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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언론보도]안보이고 안들리지만 명품 구두 만든다
작성일
2011-06-07 10:26

사장은 시각장애, 종업원은 청각장애… 신세계 쇼핑몰 입점
40년 구두 장인이 기술 전수… 이명박 대통령도 단골 "유명 수제화와 떳떳이 경쟁"

"기~~~~잉." 귀를 찌르는 소음이 198㎡(60평) 정도의 철제 건물을 뒤덮었다. 대형 기계 6대가 번갈아 가며 "끼익, 끼익" 날카로운 기계음을 냈지만 6명의 직원은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3일 경기도 파주 월롱면 영태리에 있는 수제화 전문 제작 회사 '구두 만드는 풍경'.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장 안에선 직원들이 저마다 기계 앞에 앉아서 가죽을 다듬고 틀에 맞춰 모양을 잡은 뒤 광을 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나누지 않고 있었다. 가죽에 불을 갖다 대며 다듬고 있는 한 직원에게 "무슨 공정이냐"고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깨를 살짝 건드리니 그때야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해도 그들의 손을 거친 구두는 명품이 된다. 3일 경기도 파주시의 수제화 전문제작 회사‘구두 만드는 풍경’의 유석영 대표(오른쪽 세 번째)가 사회복지사 및 직원 등과 함께 완성된 수제화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들이 만든 구두의 품질이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이 친구들은 들리지도 않고 말도 못합니다."

공장 한쪽에 있던 사회복지사 문은경(39)씨가 달려오며 말했다. 구두를 만드는 풍경은 시각장애인 CEO 유석영(49) 대표와 청각장애인 직원 6명이 함께 꾸려가는 회사다. 그들에다 구두 장인 1명, 사회복지사 3명이 함께 일한다.

이 회사가 설립된 건 지난 2009년 12월.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을 운영해본 유 대표는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전문 기술 보유를 통한 '경제적 자립'인 걸 깨달았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을 통해 1억여원의 자금을 지원받고, 그동안 모아둔 돈을 조금 더 보태 공장과 중고 기계 12대를 사들였다. 에스콰이아 등 국내 유명 제화업체에 물건을 납품하는 창성피혁에서 "최고의 신발을 만들어달라"며 가죽을 납품해 힘을 보태 줬다.

회사를 차렸지만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 대표는 "구두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줄 구두 장인을 모시는 게 가장 힘들었다"면서 "삼고초려가 아니라 삼십고초려는 더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장애인들끼리 합심해 세운 공장에서 제일 큰 문제는 의사 소통이었다. 공장 천장에는 '말이 안 통하면 눈치로 통하자'는 팻말이 달려 있었다. 대부분 기술을 새로 배워야 되는 데다 손발을 맞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장인과 직원들 또는 직원들 간에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작업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전문 통역사가 방문해 의사 소통을 도와도 구두 장인이 지시하는 말을 잘못 알아들어 신발을 망칠 때도 있었다. 울고 달래고 오해 푸는 시간만 3~4개월이 족히 걸렸다고 한다.

2009년 말 설립 초기부터 이 회사에서 일한 안윤승(42)씨는 사회복지사의 수화를 통해 "이제는 서로 사정도 잘 알고 상담도 해줄 정도가 됐다"며 "내가 일하는 모습을 비장애인인 아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안씨가 받는 월급은 110만원 정도. 자기처럼 말을 못하는 아내도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림을 돕고 있다.

그 옆에서 신발 광내는 작업에 여념이 없던 문창빈(35)씨는 세탁 공장에서 빨래를 개고 나르는 작업 등을 해오다 '구두회사'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함께 찾아왔다. 사회복지사 문은경씨는 "창빈씨는 청각 장애가 있고, 인지 능력도 떨어진다"면서 "세탁 일은 힘들어했는데 손재주가 아주 좋아서 구두 장인의 칭찬을 제일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구두 제작을 가르치는 백상현(56)씨는 40년 가까이 국내 유명 제화 브랜드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백씨는 "동정해서 온 게 아니다. 진정한 장인으로 키워보고 싶어서 합류하게 됐다"며 "직원들이 열의도 높고 집중력도 뛰어나 기술 수준을 단기간에 높여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립의 열의로 뭉친 이들이 지난해 탄생시킨 첫 작품이 수녀를 위한 '편한 신발'이었다. 공주 장애인종합복지관을 찾았다가 수녀들이 발이 불편하다는 얘기를 듣고 3개월간 노력 끝에 신발 300켤레를 납품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어머니들 사이에서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알음알음으로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우 배한성, 가수 서유석씨 등이 이들의 '홍보맨'을 자처하고 나섰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도 이 회사 고객이 됐다. 처음엔 동정심에서 사 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신다 보면 품질 때문에 다시 찾게 된다고 한다. 최근엔 신세계 백화점 인터넷 쇼핑몰 입점까지 결정됐다. 품질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받은 셈이다. 유석영 대표는 "장애인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질 낮은 제품을 강매하기도 한다. 그런 관행이 자립심을 더 줄여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품질 제품으로 유명 수제화와 떳떳하게 경쟁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게 우리들의 목표"라고 말했다.